2024년, 창간 10년을 맞이한 예천저널은 예천의 ‘나이테’ 역할을 하기 위해 노력했습니다. 이제 독자 여러분들의 문학적인 감성을 키우기 위해 새로운 연재를 시작합니다. ‘문학 이야기’라는 주제로 매주 독자 여러분을 찾아갑니다.

‘문학 이야기’의 첫출발은 전태흥 여행작가의 본지 기고 칼럼인 음악 관련 글부터 연재합니다. 독자 여러분의 많은 응원을 기대 합니다.

전태흥 작가는 경북대 국어국문학과 졸업하고, 김범일 대구시장 대변인과 조해녕 대구시장 대변인, 민주화운동 관련자 인정(민주화운동 관련자 명예회복 및 보상심의위원회), 교통전문업체인 ㈜미래티엔씨 대표를 역임하고 현재 고향인 부산에서 도서관을 운영중입니다.

저서로는 ‘사람의 숲에서 보내는 편지’, ‘슬픈 영혼 사람의 길을 묻다’ 등이 있습니다.

▲ 전태흥 작가

히포크라테스 선서는 “나의 생애를 인류 봉사에 바칠 것을 엄숙히 서약하노라" 라고 시작한다. 이는 그 어떤 직업도 마찬가지지만 의사라는 직업이 인간에 대한 예의를 지키는 것임을 웅변하고 있다.

하지만 불행하게도 서양 음악사에는 의사의 윤리보다는 헛된 명성을 꾸며 개인적인 부를 축적하는데 몰두했던 한 의사가 등장한다.

음악사에 웬 의사일까 싶지만, 그는 음악의 아버지와 어머니라 불리는 바흐와 헨델을 사망에 이르게 한 사람이었다. 같은 해에 지금의 독일에서 태어난 뛰어난 작곡가라는 점 이외에도 바흐와 헨델은 비슷한 점이 많았다.

그들은 50대에 백내장을 앓았는데 요즘에는 백내장이 그다지 어려운 수술이 아니지만 1700년대에 백내장은 신중한 수술과 치료가 요구되는 심각한 안질환이었다.

헨델과는 달리 가난한 음악가의 집안에서 태어나 독일의 한적한 시골에서 스무 명이나 되는 자녀들을 오로지 음악 하나로 부양해야 했던 바흐에게 찾아 온 눈 질환은 삶의 기반 자체를 무너뜨리는 절망이었을 것이다.

그런 그에게 영국의 안과의사, 존 테일러가 제안한 수술은 자신의 음악과 자신의 가족을 위한 희망의 불빛이었다. 하지만 그런 절박한 바흐에게 이 영국 의사의 수술은 지금의 의료상식으로 비추어보면 그야말로 비상식적인 것이었다.

비둘기 피를 눈에 떨어뜨리고 부엌에서 쓰는 설탕과 소금으로 소독한 후 커다란 동전으로 안대를 만들어 붙이는 수술의 결과가 어떠했을지는 짐작하기 어렵지 않다. 바흐는 수술 후 3개월이 지난 뒤 완전히 실명하고 말았다. 하지만 음악사에 비극적인 사건은 이것으로 그치지 않았다.

독일의 한적한 시골에서 이루어진 이 수술의 결과를 전혀 알지 못하고 영국에서 작곡에 전념하고 있던 헨델은 오랜 지병인 백내장 수술을 존 테일러에게 맡겼다. 문제는 두 거장에게 행한 수술이 무면허 돌팔이 의사가 한 수술이 아니라 정식 의료수업을 받았던 의사가 한 당시 유행했던 수술이라는 데 있다.

검증되지 않은 수술을 했다고 비난할 이유는 없다. 다만 존 테일러는 바흐의 눈이 실명에 이르게 된 이후에도 수술이 성공적이었다고 대대적으로 홍보했고 언론은 아무런 확인도 없이 성공적인 수술에 대해 받아썼다. 그 결과 헨델은 아무런 의심 없이 존 테일러의 수술대에 올랐고 그 역시 실명한 후에 죽음에 이르고 말았다.

1987년 폭압적인 군사독재 정권의 어둠 속에서 자행되었던 서울대생 고 박종철 열사의 고문치사 사건을 세상에 폭로한 양심적인 의사가 있었다.

꽃다운 젊은이를 고문한 것도 모자라 죽음에 이르게 한 거대한 폭력 앞에 자신에게 닥쳐올 고난과 두려움을 무릅쓰고 의사 오연상은 인간 앞에 봉사한다는 의사의 윤리를 지켰다.

결국, 그의 용기가 기폭제가 되어 87년 6월 항쟁은 타올랐고 그 불꽃 앞에 전두환 군사독재 정권은 무릎을 꿇고 말았다. 오연상은 그 후 인터뷰에서 마땅히 해야 할 일을 했을 뿐이라고 말했다.

역사는 후퇴하는 것일까? 그로부터 30년이 지난 2016년 경찰의 물대포에 맞아 의식을 잃고 사경을 헤매던 고 백남기 농민이 결국 317일 만에 죽음에 이르렀다.

누가 봐도 그 죽음이 물대포에 의한 외인사임이 분명한데도 그 죽음을 병사라 적어 경찰의 부검영장 신청에 면죄부를 주려한 의사가 있었다. 논란이 되자 그는 의료인의 가치 기준을 들먹이며 “환자 생명의 존엄성은 어떤 가치보다도 상위에 있으며” 자신은 “의학지식을 인륜에 어긋나지 않게 쓰겠다는 히포크라테스 선서는 의료현장에서 변함없이 지켜오고 있는 의료행동 윤리”라고 말했다.

그는 한발 더 나아가 고 백남기 농민이 유족들의 치료거부로 돌아가셨기 때문에 병사라는 말을 하면서 유족들에게 심심한 위로의 말까지 전했다.

그의 뻔뻔한 변명을 하나하나 반박할 이유를 느끼지 못했던 것은 영국의 작가 이언 레슬리(Ian Leslie)가『타고난 거짓말쟁이들』에서 아우슈비츠의 가스실에서 유대인을 학살하는 데 앞장섰던 의사들도 자신들은 히포크라테스 선서에 충실했다는 말을 했다고 확신한 구절 때문이었다.

뇌종양 전문의로 지난 3년간 고 백남기 농민의 수술을 포함해 단 두 번의 뇌출혈 수술밖에 해보지 않았던 백선하가 히포크라테스의 의료행동 윤리를 지켜왔다는 말을 내뱉을 때, 그는 이미 의사가 아니라 장사꾼이었다.

그는 자신이 병사라 쓴 사망진단서가 가져올 손익계산서 앞에 웃었을 것이다. 이미 화석이 되어버린 히포크라테스 선서는 자신의 탐욕을 채워줄 거짓 자격증에 불과했다.

의사 오연상과 장사꾼 백선하를 함께 이야기하는 것조차 불쾌한 일이지만 우리가 기억해야 할 역사는 명예뿐만이 아니라 오욕도 포함되어야만 한발 앞으로 나아갈 수 있기 때문이다.

이런 생각을 하면서 오랜만에 바흐의 “무반주 첼로 모음곡”을 들었다. 여섯 개의 모음곡으로 이루어진 이 곡은 스페인의 첼리스트 파블로 카잘스가 열세 살 때, 바르셀로나의 헌책방에서 발견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하지만 사실은 그 전에 이미 출판되었고 카잘스가 그의 나이 마흔여덟이던 1925년 이후로 공개적으로 연주하기 시작하면서 주목을 받기 시작했다. 카잘스의 전곡 연주와 녹음 이후로 첼로뿐 아니라 다양한 악기로 편곡되고 수많은 연주자들에 의해 연주되면서 이 곡은 그야말로 첼로의 구약성서라 불리게 되었다.

스페인의 프랑코 독재정권에 맞서 싸우며 이국을 떠돌다 아흔여섯의 나이로 세상을 떠난 후에야 고향으로 돌아온 카잘스, 자신의 조국이 독재자 프랑코에 의해 유린당했던 10년 동안 연주를 멈추었던 그 카잘스에게 음악은 사람을 위한 것이었다.

오늘, 불을 끄고 그의 연주를 들으며 다시금 생각에 잠긴다. 히포크라테스 선서를 온몸으로 지켰던 이와 그것을 팔아 치부하려는 자들을 역사는 어떻게 기억할까?. 부끄러움을 알지 못하는 이들이 그저 국민 위에 군림하려는 이 슬픈 나라, 첼로의 무거운 저음이 가슴을 짓누른다.